본초학의 역사
본초학의 역사
1. 중국의 본초학의 기원과 주요저서
-- 중국의 본초학 발달과정은 아래와 같이 4시기로 이루어진다.
제 1 기 : 전본초기라고도 불리는 선주시대
제 2 기 : 본초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한진시대
제 3 기 : 도홍경으로부터 증류본초에 이르는 본초의 전성기
제 4 기 : 약리설이 주체가 된 금원이후의 시대
1) 신농 본초경
동양에서 신농 본초경은 약에대한 가장오래된 문헌 중에 하나이다. 그원전에 대한 고증은 알길이 없다.
신농씨는 전설상의 인물로 처음 사람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며, 자연에서 생육하고 있는 모든 개개 식물과 광물에 대하여
몸소 맛을 보고 독성여부를 판별하여 하루에 1백가지 약초의 약효를 결정하였다고 하며, 매일 70회나 약물중독을 일으 켰다고 한다.
책에서는 마황은 천식치료, 상산의 학질에 대한 치료작용, 연실의 구충작용 및 대황의 사하작용등 대다수의 내용들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는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신농은 동야에서 본초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최고 약물학서인 신농본초경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2) 한. 진 시대
화타, 아귀지, 오보등이 약용식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3) 6C초 양 나라
양나라 도홍경이 당시에 널리 유행되던 명의별록과 본초경의 내용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본초집경주를 편찬 하였다.
본초집경주에는 약물 730종에 대해 수록 되어 있어서 약물종류가 이전 시대에 비하여 증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옥석, 초, 목, 충수,
과채, 미곡등의 자연적인 기원에 의하여 분류 함으로써 본초학에 있어 약물의 자연분류법의 효시가 되넜다.
그리고 약물의 채취시기, 저장, 보관, 진위감별, 포제방법, 제약규범 등에 대한 설명이 일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본초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4) 북송시대
증류본초
경사증류비급본초를 송시대를 전 후 하여 국가에서 몇 차례에 걸쳐서 수정작업을 하여 수정작업올 하여 경사중류대관본초
(經史證類大觀本草) . 정화신수경사중류비용본초(政和新修經~~證類備用本草)등을 출판하게 되는데 후세에 이르러 이 두 서 적올
통칭하여서 증류본초(證類本草)라고 부른다.
중류본초(證類本草)는 宋이전의 본 초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본초서로서 많은 고대명저들의 정화가 유지되어 있으며 초기 문헌들의
내용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어서 본초강목(本草網텀)이 출판되기 이전에 널리 사용되었던 대형 본초서 (本草휩)이며 본초학(本草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 요한 참고 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 조선시대의 본초교과서로도 사용되어서 허준선생의 동의보감에도 자주 인용되었던 책이다.
이 책에 인용되어진 고대의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이 책의 본문에서 그 개요가 규명되어 있으므로 실용적인 가치가클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문헌사적 의의를 가진다.
5) 명나라
본초강목(本草鋼텀)
이시진(추時珍)이 중류본초 이후 500년간 출판된 여러 종의 본초서(本草 홈)들을 읽고 여기에 수록된 많은 실용약물에 대하여 기존의
효능과 새로운 효능 외 에 약물채취, 감정, 제조 및 용약(用藥)에 대해서 본인이 연구한 경험을 추가하고, 증류본초(證類本草)를
근간으로 하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백가(百家)의 본초서(本草) 약 800종을 참고하고, 실지조사연구를 통하여 진위를 감별함으로서
52권으로 편 찬한 본초서(本草書)이다.
이는 중국의 16세기 이전의 본초학(本草學)의 성과를 총괄한 책으로, 출판 후 300여년에 걸쳐서 수차례 편찬되었으며,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러시아 퉁에 변역 본이 출판됨으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한국의 본초학의 기원과 저서
1) 고구려
고구려인이 본초에 대한 지식이 높았고, 백제와 신라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가장 접촉이 빈번하여 자연적으로 중국문화(中國文化)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주기도 하였다.
약서(藥書) 중 본초서(本草書)가 수입된 시기는 고구려 평원왕 3년(561)에 중국 오나라의 지총(知聽)이 약서(藥홈) . 내외전(內外典) .
명당도(明堂圖) 퉁 164권을 가 지고 고구려를 거쳐서, 일본으로 귀화하였는데, 이때 지총(知廳、)에 의하여 고구려에 전해진 본초서는
도홍경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많)3권 및 산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 集註)7권, 명의별록(名醫別錄)3권, 신농본초경뇌공집주
(神農本草經雷公集註), 오보 본초(吳普本草)6권, 이당지(李當之)의 본초경(本草땐)l권. 통군약록(폐君藥錄) 3권 등이며,
이밖에도 많은 의약서적이 도입되었다.
고구려는 많은 자국산 야생 약초를 본초서를 인용하여 질병치료에 이용하였고, 또 중국과의 약물의 물물교환이 성행하게 되었다.
강(梁)나라의 도홍경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輕集註)에 고구려 인삼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며,
당시 고구려 지방(지금의 만주 지역)에 자연산 인삼이 자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오래 전부터 인삼이 소중한 약재로 취급되어
온 것은 확실하다.
도홍경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인삼임 뿌리는 길고 황색이며 방풍뿌리와 비슷하고, 맛은 달고 잎은 삼출(三出)또는 오출(五 出)이라
하였으며, 비교적 외부형태학적인 기술을 후세사람을 위하여 상세히 기록하였다. 중국 황하(黃河)의 북쪽 산시성(山西省) 다싱산맥
(大行山服)으로부터 산 출되는 상당산(上黨塵) 인이 가장 품질이 우수하고, 다음으로 고구려인삼, 백체인 삼, 신라인삼 순으로 질이
양호하다고 기재하였다.
2) 백제
백제는 약부라는 관부 두고 있었고, 채약사라는 관직이 있어서 상약을 정리하여 체계적인 약용식물의 감별과 체취 · 채취시기
등의 약초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연구하는 전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본초에 학식이 높은 채약사가 있었던것은 지리적 입지조건으로 보아 덕유산, 남덕유산, 백양산,내장산 · 계룡산 · 속리산 등지에
많은 생약자원이 자생하였기에 이지역의 약용식물자원을 이용하는 본초의 전문인이 있었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신농원초 경집주
(神農本草않集註)에 백제 인삼의 외형은 가늘고 길며 뿌리는 딱딱하고 유백색을 띠는 양종(良種)이라고 수록한 것은 백제 인삼의 우수성
을 입증한 것이며, 당시 공품으로 토산의 인삼을 중국과 교역화여 백재제의 약물학의 높아진 위상 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중국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왕래가 어려웠고, 북쪽에 고구려,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상으로도 본초서의
도입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시대 고유의 상약이 발전 되었을 것이다.그 예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핸{따갯註) 또는.
신수본포(新修本草)에 신라의 약재가 소개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지역적인 초 건이 불리하였다고 본다. 그 뒤 739년
(성덕왕 12)에 이루어진 진장기(빠꽤쐐)외 깐 초습유(本草治週)1순(李뼈)의 해약본초(海藥本草)에 신라의 -초가 소게된
것으로 보아 삼국 중에서 신라의 본초발전이 약간 늦었다고 본다.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은 통일신라 때의 고유한 의서로서 저서의 내용은 약옳 복용 시 주문(뻐文)과 몸가짐의 자세 퉁을 수록하였다.
또 다른 저서인 신라법사비밀 방(新羅法師秘密方)에는 말벌의 봉소(峰짧)인 노봉방(말벌집)을 기재하였고, 이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찜)
에 수록 되어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는 중국보다 금(金)의 정련법이 훨씬 앞서 있었다고 보며, 특히 광물생약을 약으로 응용할 수 있게끔 불순물을
정제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자적 경험에 의하여 터득된 민족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약물학이 발전하여 약물의 종류가 더욱 풍부 해지고 국가차원의 약제 관리도 시행되게 되었다.
또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섬과 의학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신라에서는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치
로서 신문왕 때에 의학이 설치되어 체계적힌 의사의 양성도 진행되었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최고 의료괜북록깐주로 귀족 지배층의 건강관리를 위한 약물의 공급과 질병치료를 전담하는 전의사(典醫훨)와
봉의서가 있었고, 서민을위해서는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 혜민국이 있었다.
또, 의학 교육제도의 확대와 더불어 최초로 국가고시인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특히 고려시대에는 많은 의서 들이 편찬되어,
현존하고 있는 초고의서중 하나인 구선활인심방과 향 약구급방(獅藥救急方) 등이 편찬되게 되었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서는 개국 초부터 의학이 발전하였다. 조선 개국 초 태조는 육학(六學) 올 설치하여 그중에 의학을 두어 의사를 양성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때는 의녀(醫女) 제도가 창시되어 1406년부터 여자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였다. 1427'년에는 약재의 채취와 가공방법
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향약채취월령(鄭藥採取月令〕이 편찬되기도 하 였다.
1431년에는 노중례, 박윤덕 퉁이 향약집성방을 편찬하면서 당시까지의 본초학 각 성과를대성하여 향약본초를 편차하였다.
향약채취월령에서는 채취방법에만 치 F쳐 임상웅용 부분이 부족했지만 향약본초에서는 변중론적 방법무로 처방하는 원칙 풍을 상세히
서술하는 등 임상에 적합하게 쓰이게 되었다.
1477'년에는 의방유취 (짧方 類聚)가 총 365권에 달하는 방대한 서적으로 만들어졌다. 6C말에는 중국에서 완성 된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들어와 우리나라 본초학 지식올 더욱 풍부하게 하 켰다.
또한 조선 중기의 1596년에 착수하여 1610년에 완성된 허준의 동의보감 (東醫寶鍵)은 민족의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에 보기 드문 의서로서 동양의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1644년에는 침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허임
(許任) , 사암(舍岩) 등이 침구경험방(誠꼈經l짧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6) 18C 이후
이제마는 다년간의 임상실무와 학문 연구를 통해 1894년 4권의 동의수세보원(東醫훌훌世保元)을 저술하여 사상의학
(四象醫學)의 라는 독창적인 의학이론을 수립 하였다.
1910년 이래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는 의료제도와 시책면에서 한의학이 거의 말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말살한것과 더불어 한의학도 말살하려는 정책을 감행하여 한의학(韓醫學)의 발전이 중단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