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초학(本草學)역사

본초학(本草學)의 역사

자연치유카운셀러 2013. 9. 13. 14:15

 

 

 

 

 

 

 

본초학(本草學)의 역사

 

 

1. 기원

 

(1) 중국(中國)의 본초학(本草學)의 기원과 주요 저서

 

■ 중국의 본초학(本草學) 발달과정은 아래와 같이 4시기로 이루어진다.

 

 

 

1)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동양에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약에 대한 가장 오래원 문헌 중의 하나이다.

 

그 원전(原典)에 대한 고증은 알 길이 없다. 신농씨(神農民)는 역경(易經) , 회냥자 (堆南子) . 수신기(裡神記) . 사기(史記) 등에 기록된 전설상의 인물로서 처음으로 사 람에게 농사짓는 방법과 상업하는 요령을 일깨워 주었고, 자연에서 생육하고 있는 모 든 개개 식물과 광물에 대하여 몸소 맛을 보고 독성여부를 판별하여 하루에 1백가지의 약초의 약효를 결정 하였다고 하며, 매일 70회나 약물의 중독을 일으켰다고 한다.

 

책에서는 마황(麻黃)의 천식치료, 상산(常山)의 학질에 대한 치료 작용, 연실의 구충작용(隨蟲作用) 및 대황(大黃)의

사하작용(鴻下作用) 등 대다수의 내용들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과학적 으로도 입증(立證)되고 있는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 날에 신농은 동양에서 본초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최고의 약물학서인 신농 본초경(神農本草經)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예전 산일(散失)되었으며, 양(梁)나라의 도홍경(關弘景)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 오씨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송나라의 증류본초 (證類本草)등의 역대 본초서의 내용을 통하여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이름이 보존되어 왔고, 그 밖의 다른 의약서적에도 그 자료가 일부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 여러 종류의 복원본이 만 들어졌다.

 

2) 한 · 진 시대 

화타. 이귀지(李歸之). 오보 등이 약용식물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3) 6C초 양(梁)나라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 :

양나라의 도홍경이 당시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명의별록 과 본초경(本草經)에 내용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찬하였다.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에는 약물 730종에 대해 수록되어 있어서 약물 종류가 이전 시대에 비하여 증가되었을 뿐 아니라, 옥석(王石) , 초(草), 목(木) , 충수(蟲默) , 과채(果菜). 미곡 등의 자연적인 기원에 의하여 분류함으로써 본초학(本草學)에 있어 약물의 자연분류법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방법은 후세의 본초서[증류본초(證類本草). 본초강목]등에서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에는 제병통용약(諸病通用藥) 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변증용약(辦證用藥)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되어 었다. 그리고 약물의 채취시기, 저장, 보관, 진위감별, 포제방법, 제약규범 등에 대한 설명이 일 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본초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4) 7C의 당 나라

 

본초학 관련 저서들이 약 30여종이 저술이 되었다,각의 체계와 내용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증치(證治)와 해설(解說)이 일관되지 않아서 정리하여야 할부분이 많이 있다.

 

신수본초(新修本草) :

소경(蘇敬) .이적(李動)이외 20여 인의 의술인 들이 편찬한 저서로 약물 884종에 관한 사향을기재하고 전국 각지의 약재 표본 그렴을 수집하여 서기 659년에 반포하였는데 당 본초(本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수본초(新修本草) 는 국가가 반포한 최초의 약전으로, 세계 최초의 약전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5) 북송(北宋)시대

 

① 개보상정본초(開寶詳定本草), 개보중정본조(開훨重定本草)

고대의 의서들을 정리하여 다시 발간하는 사업으로서 발간된 본초서적들이다.

 

②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장우석(掌禹錫)의 가우보주본초(흙祐補注本草)와 소송의 본초도경을 근거로 하고 기타 의방류서를 참고하여 당신미가 편잔한 종합 약물학서적이다. 이후의 역대의가(歷代醫家)들이 중요시하는 본초서 이다.

 

③ 증류본조(證類本草)

경사중류비급본초(經證類備急草)를 송(末)시대를 전후하여 국가에서 몇 차례 에 걸쳐서 수정작업을 하여 경사증류대관본초(經證類觀本)‘ 정화신수경사증류 비용본초(政和新修經證類備用本草)등을 출판하게 되는데 후세에 이르러 이 두 서 적을 통칭하여서 증류본초(證類本草)라고 부른다.

 

증류본초(證類本草)는 宋이전의 본 초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본초서로서 많은 고대명저들의 정화가 유지되어 있으며 초기 문헌들의 내용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어서 본초강목이 출판되기 이전에 널리 사용되었던 대형 본초서(本草뿔)이며 본초학(本草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참고 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본초교과서로도 사용되어서 허준선생의 동의보감(東醫寶鍵)에도 아주 인용되었던 책이다. 이 책에 인용되어진 고대의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이 책의 본문에서 그 개요가 규명되어 있으므로 실용적인 가치클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문헌사적 의의를 가진다.

 

6) 명 (明)나라

 

① 본조품회정요(本草品홈精要)

유문태(劉文泰) 등이 왕명에 의해서 편잔한 본초서(本草휠)로 내용이 간단 명료하면서도 상당히 정확하다. 이 책은 신수본초(新修本草)에 이어서 국가에서 편찬한 두 번 째의 본초서(本草홈)이다.

 

② 본초강목(本草網目)

이시진(李時珍)이 증류본초(證類本草)이후 500년간 출판된 여러 종의 본초서들을 읽고 여기에 수록된 많은 실용약물에 대하여 기존의 효능과 새로운 효능 외에 약물채취, 감정, 제조 및 용약(用藥)에 대해서 본인이 연구한 경험을 추가하고, 증류본초(證類本草)를 근간으로 하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백가(百家)의 본초서 약 800종을 참고하고, 실지조사연구를 통하여 진위를 감별함으로서 52권으로 편 찬한 본초서(本草書)이다.

 

본초강목(본초강목)은16부(部), 62류(類)로 되어 있고 1892종의 약물(藥物) . 약도(藥圖)1120폭(帳)을 수록하였는데, 1590년에 금릉(金陸)에서 처음으로 인쇄되었다.

 

이는 중국의 16세기 이전의 본초학(本草텔)의 성과를 총괄한 책으로, 출판 후 300여년에 걸쳐서 수차례 편찬되었으며,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에 변역 본이 출판됨으로서 세계걷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2) 한국(韓國)의 본초학(本草學)의 기원과 주요저서

 

1) 삼국시대

 

① 고구려

 

고구려의 의방(醫方)이 당대에 채용된 것으로는 752년 당나라의 왕도가 지은 외태비요방(外台秘要方)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구려인이 본초에 대한 지식이 높았고, 백제와 신라에까지 그 영향올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가장 접촉이 빈먼하 여 자연적으로 중국문화(中國文化)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주기도 하였다.

 

양나라의 도홍경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集註)에 고구려 인삼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며, 당시 고구려 지방(지금의 만주 지역)에 자연산 인삼이 자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오래 전부터 인삼이 소중한 약재로 취급되어 온 것은 확실하다.

 

도홍경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인삼의 뿌리는 길고 황색이며 방풍(防風)뿌리와 비는하고, 맛은 달고 잎은 삼출(三出) 또는 오출이라 하였으며, 비교적 외부형태학적인 기술을 후세사람을 위하여 상세히 기록하 였다. 또한 중국 횡하(黃河)의 북쪽 산시성(山西省) 다싱산맥(大行山服)으로부터 산출되는 상당산(上黨꿇) 인삼이 가장 품질이 우수하고, 다음으로 고구려인삼, 백제인 삼, 신라인삼 순으로 질이 양호하다고 기재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재 법은 중량을 논하였을 뿐 실제로 몇 년생의 산삼이 가장 효과가 우수한지는 언급하지 않았 으며, 통일 종류의 인삼이란 기후와 풍토에 의한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약성의 효과에서는 중국산 · 한국산 · 소련산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명의별록에 고구려 · 신라 · 백제 인삼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삼은 귀중한 약으로 사용되었고 이웃나라와의 교역에 큰 몫을 한 약용식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 다. 지금도 인삼은 보기약(補氣藥)의 대표적인 생약이며, 해를 거듭할수록 그 진가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② 백제

 

백제는 약부(藥部)라는 관부를 두고 있었고 채약사(與藥師)라는 관직이 있어서 상약(常藥)을 정리하여 체계적인 약용식물의 감별과 채취 · 채취시기 등의 약초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연구하는 전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본초에 대한 학식이 높은 채약사가 있였단 것은 지리적 입지조건으로 보아 덕유산 · 남덕유산 · 백양산 · 내장산 . 계룡산 · 속리산 등지에 많은 생약자원이 자생하였기에 이 지역의 약용식물자원을 이용하는 본초의 전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산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集註)에 백제 인삼의 원 가늘고 길며 뿌눈 딱딱하고 유백색 을 띠는 양종(良種)이라고 수록한 것은 백제 인삼의 우수성을 입증한 것이며, 당시 공품(頁品)으로 토산의 인삼을 중국과 교역하여 백제 약물학(藥物텔)의 높아진 위상 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시대에 완성된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은 일본의 단바가 편술한 의심방(醫心方) 중에 폐옹방(뼈癡方)과 정종방(T睡方)을 응용함으로써 백제의 의서가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은 중국 진(륨)나라 때 갈홍의 저서인 주후방(附後方) 6권을 응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 백제에는 갈씨주후방이 유입되어서 백제 본초학(本草學)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도있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중국과의 교통이 불편하여서 왕래가 어려웠고, 북쪽에 고구려, 서쪽에 백제 가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상으로도 본초서의 도입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시대 고유의 상약(常藥)이 발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이르러서는 당나라 본초학의 영향을 받아서 본초학 이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채용되었던 본초서로서는 신농본초경. 명의별록3권, 신농본초경 집주(神農本草集註)7권, 신수본초 등이 있는데 당시 본초경의 모체가 되어서 통일신라의 천연물 발전에 가장 기여한 의약서의 하나이 다. 신라법사방(新繹;法師方)은 통일신라 때의 고유한 의서로서 저서의 내용은 양을 복용 시 주문과 마음가짐의 자세 등을 수록하였다. 또 다른 저서인 신라법사비밀방(新顯法師秘、密方)에는 말벌의 봉소인 노봉방(말벌집)을 기재하였고, 이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에 수록되어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노봉 방은 유션염및 피부소양증의 치료목적으로 외용제로 쓰이기도 하는 동물생약의 하나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약용식물로는 단연 인삼으로서 가장 인기가 있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인삼 다음의 약용식물로는 중부 · 북부지방의 특산약물인 노랑 돌쩌귀(白附子)를 비롯하여 오미자 · 족두리풀(細辛) . 토사자 · 관동화 · 곤포 · 밤 · 대 추 · 무이. 황칠 등이다.

 

삼국시대 당사 고구려는 중국보다 금(金)의 정련법이 훨씬 앞서 있었다고 보며, 특 히 광물약으로 응용할 수 있게끔 불순물을 정제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자적 경험에 의하여 터득된 민족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약물학이 발전하여 약물의 종류가 더욱 풍부해지고 국가차원의 약제 관리도 시행되게 되었다. 또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의학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신라에서는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치로 서 신문왕 때에 의학이 설치되어 체계적인 의사의 양성도 진행되었다.

 

 

3)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 의료제도는 큰 변통이 없었고, 통일신라의 본초학 방식을 그대로 따르 면서 중국의 송나라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고려에서 송나라에 전해진 약재로는 인삼을 비롯하여 유형· 송자(松子) . 향유(香油) 등이며, 송나라에서 고려로 들여온 약품은 국내에는 자생하지 않는 정향(T香) . 침향(沈香) . 목향 등의 방향성(芳香性) 향약을 비롯하여 희귀한 열대아시아산 서각. 육두구(肉豆久) . 빈랑자. 몰약(沒藥)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최고 의료기관으로서 주로 귀족 지배층의 건강관리를 위한 약물의. 공급과 질병 치료를 전담하는 전의사 와 봉의서가 있었고,

 

서민을 위해서는 동서대비원. 혜민국(惠民局)이 있었다. 또, 의학 교육제도의 확대 와 더불어 최초로 국가고시인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많은 의서 들이 펀찬되어,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서 중 하나인 구선활인심방과 향약구급방 등이 편찬되게 되었다.

 

 

4) 조선시대

 

고려시대로부터 독창성을 발휘하여 향약(鄭藥:우리나라의 약)이라는 명칭을 애용하 게 된 이후로 기존에 사용되던 중국산 및 열대산 약재의 명칭을 국산으로 바꾸려고 . 힘썼고, 민간에서 폭넓게 계속 사용하여온 상약, 향약, 경험에 의한 경험방등 여러 측면에서 자료를 수생 자립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조선시대 에서는 개국 초부터 의학이 발전하였다. 조선 개국 초 태조는 육학(六學) 을 셜치하여 그중에학을 두어 의사를 양성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때는 의녀(醫女0) 제도가 창시되어 l406년부터 여자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였다.

 

1427년에는 약재의 채취와 가공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향약채취월령(椰藥採取月令)이 편찬되기도 하 였다. 1431년에는 노중례, 박윤덕 등이 향약집성방을 편찬하면서 당시까지의 본초학 의 성과를 집대성하여 향약본초를 편차하였다. 향약채취월령에서는 채취방법에만 치 우쳐 임상응용 부분이 부족했지만 향초에서는 변증론적 방법으로 처방하는 원칙 퉁을 상세히 서술하는 등 임상에 적합하게 쓰이게 되었다.

 

1477년에는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총 365권에 달하는 방대한 서적으로 만들어졌다. 16C말근 중국‘완성 된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網팀)이 들어와 우리나라 본초학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하 였다.

 

또한 조선 중기의 1596년에 착수하여 1610년에 완성된 허준(許俊)의 동의보감 (東醫寶藍)은 민족의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에 보기 드문 의서로서 동양의학사의 위대한한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1644년에는 침구학 발전에 많은 공헌올 한 허임(許任), 사암(舍岩) 등이 침구경험방(鐵찢經驗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5) 18C 이후

 

이제마(李濟馬)는 다년간의 임상실무와 학문 연구를 통해 1894년 4권의 동의수세 보원(東醫觀保元)을 저술하여 사상의학(四象醫學)01라는 독창적인 의학이론을 수립 하였다.

1910년 이래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는 의료제도와 시책면에서 한의학이 거의 말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말살한 것과 더불어 한의학도 말살하려는 정책을 감행하여 한의학(韓醫學)의 발전이 중단된 시기였다고 할수 있다.